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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아키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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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와라노 아키미쓰는 944년에 태어나 1021년에 사망한 헤이안 시대의 귀족으로, 최종 관위는 좌대신 종1위였다. 970년 관직에 진출하여 996년 우대신이 되었으나, 실권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에게 있었고,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딸 겐시를 이치조 천황에게 뇨고로 입궁시켰지만 외척이 되는 데 실패했고, 말년에는 좌대신으로 승진했다. 사후에는 악령 좌부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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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아키미쓰
기본 정보
자식부일기 그림 두루마리 (모사본)
시대헤이안 시대 중기
출생944년
사망1021년 7월 7일
이명호리카와 좌대신, 악령 좌부
관위종1위, 좌대신
주군무라카미 천황, 레이제이 천황, 엔유 천황, 가잔 천황, 이치조 천황, 산조 천황, 고이치조 천황
씨족후지와라 북가구조류
부모아버지: 후지와라노 가네미치, 어머니: 쇼시 여왕 (미나모토노 다이라의 딸)
형제자매후지와라노 아키미쓰, 고시, 도키미쓰, 아사아키라, 도미쓰, 마사미쓰, 완시, 지카미쓰, 요미쓰
배우자모리코 내친왕 (무라카미 천황의 황녀), 후지와라노 도오카즈의 딸
자녀시게이에, 겐시, 엔시, 시게요시, 아키타다
기타 정보
특이 사항니조 가네이에의 아버지, 가네스케의 할아버지, 이에쓰나 (이에미쓰)의 증조부. 혼다 씨는 그 자손이라고 전해짐.

2. 생애

헤이안 시대 중기의 공경. 후지와라 북가의 유력한 구조류 출신으로, 할아버지 후지와라노 모로스케와 아버지 후지와라노 가네미치의 후광을 입어 응화 원년(961년)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 가네미치가 간파쿠로 집권하던 시기에는 순조롭게 승진하여 덴엔 3년(975년) 산기에 임명되어 공경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아버지 사후에는 숙부 후지와라노 가네이에 및 그의 아들들, 특히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와의 권력 경쟁에서 밀려나 승진이 정체되었다. 조토쿠 2년(996년) 우대신에 임명되고, 말년인 간닌 원년(1017년)에는 좌대신까지 올랐으나, 실권은 미치나가에게 장악된 상태였다.

아키미쓰는 당대 인물들에게 능력 부족으로 평가받았으며[3], 딸들을 통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려던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특히 딸 엔시가 남편 아쓰아키라 친왕에게 버림받고 요절한 후, 미치나가의 딸들이 연이어 사망하자 아키미쓰와 엔시의 원령에 의한 저주라는 소문이 돌며 '''악령 좌부'''(悪霊左府)라는 별명을 얻었다.[13]

치안 원년(1021년) 종1위에 서임되었고, 같은 해 향년 78세로 사망했다[12]. 그의 생애는 명문가 출신임에도 정치적 부침과 가족사의 비극을 겪은 것으로 요약된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응화 원년(961년) 종5위하에 서임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조정은 할아버지 후지와라노 모로스케의 계통(구조류)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모로스케는 무라카미 천황 시대의 실력자였으며, 그의 딸 후지와라노 안시중궁으로서 레이제이 천황엔유 천황을 낳아 천황가와 강한 혈연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덴로쿠 원년(970년), 모로스케의 장남이자 아키미쓰의 백부인 후지와라노 고레타다가 셋쇼가 되었으나 972년에 사망했다. 이후 후계 자리를 두고 아키미쓰의 아버지 후지와라노 가네미치(모로스케의 차남)와 숙부 후지와라노 가네이에(모로스케의 삼남)가 다투었고, 결국 형인 가네미치가 간파쿠 선하를 받았다.

아버지가 간파쿠가 되자 아키미쓰도 발탁되어 승진을 거듭했다. 덴로쿠 4년(973년)에는 12년 만에 종5위상과 사에몬노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인 덴엔 2년(974년)에는 정5위하와 구로도노토를, 덴엔 3년(975년)에는 종4위하산기에 임명되어 공경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이 시점에도 이미 동생 후지와라노 아사미쓰는 곤추나곤에 올라 있어, 아키미쓰는 동생보다 승진이 뒤처지고 있었다.

조겐 2년(977년) 아키미쓰도 곤추나곤으로 승진했지만, 같은 해 아버지 가네미치가 병으로 사망했다. 이후 숙부 가네이에가 정계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아키미쓰의 승진은 멈추게 되었다.

2. 2. 승진 정체와 권력 투쟁

아버지인 가네미치가 간파쿠가 되자 아키미쓰도 발탁되었다. 덴로쿠 4년(973년) 12년 만에 승진하여 종5위상·사에몬노사에 서임되었고, 다음 덴엔 2년(974년) 정5위하·구로도노토, 덴엔 3년(975년) 종4위하·산기에 서임되어 공경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도 이미 곤추나곤이 된 동생 아사미쓰보다 승진이 늦었다. 조겐 2년(977년) 아키미쓰도 곤추나곤으로 승진했지만, 같은 해 아버지 가네미치가 병으로 사망했다.

가네미치 사후, 숙부인 가네이에가 정계의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아키미쓰의 승진은 멈추었다. 그는 가네이에의 아들들인 미치타카, 미치카네, 미치나가에게 차례차례 추월당했다. 쇼랴쿠 원년(990년) 가네이에가 사망하고 미치타카가 간파쿠가 되었을 때, 동생 아사미쓰는 미치타카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이미 다이나곤으로 승진해 있었지만 아키미쓰는 여전히 추나곤에 머물렀다.

조토쿠 원년(995년) 도쿄에 역병이 크게 돌아 많은 공경들이 잇달아 사망했다. 아키미쓰의 동생 아사미쓰를 비롯해 간파쿠 미치타카, 뒤이어 간파쿠가 된 미치카네까지 역병으로 사망했다. 이처럼 많은 고위 관료들이 사망하면서 아키미쓰는 곤다이나곤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미치카네의 후임 간파쿠 자리를 두고 나이란의 선지를 받은 우대신 미치나가(미치카네의 동생)와 나이다이진 고레치카(미치타카의 적자)가 경쟁했다. 그러나 조토쿠 2년(996년), 고레치카와 그의 동생 다카이에가잔 법황에게 화살을 쏘는 사건(조토쿠의 변)을 일으켜 실각했다. 이 사건으로 미치나가는 좌대신으로 승진했고, 아키미쓰는 공석이 된 우대신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아키미쓰는 형식적으로 다이죠칸의 차석이 되었지만, 실권은 완전히 미치나가에게 장악되었다. 아키미쓰는 이전부터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유소쿠코지쓰와 전례에 밝았던 학자 후지와라노 사네스케는 그의 일기 『쇼유키』에서 "출사 이래, 만인에게 조롱받고 있다"라고 아키미쓰를 혹평했다.[3]

2. 3. 우대신 취임과 무능 논란

조토쿠 2년(996년), 나이다이진 후지와라노 고레치카와 그의 동생 후지와라노 다카이에가 가잔 법황에게 화살을 쏘는 사건(조토쿠의 변)을 일으켜 실각하였다. 이 사건의 결과로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좌대신으로 승진하면서 공석이 된 우대신 자리에 아키미쓰가 임명되었다.[3] 이로써 아키미쓰는 형식상 다이죠칸(태정관)의 차석이 되었지만, 실권은 완전히 좌대신 미치나가에게 장악된 상태였다.

아키미쓰는 이전부터 무능하다는 평판이 있었는데, 유소쿠코지쓰(옛 관습이나 선례)와 전례에 정통했던 학자 후지와라노 사네스케는 자신의 일기 『쇼유키』에서 아키미쓰에 대해 "출사 이래, 만인에게 조롱받고 있다"라고 혹평했다.[3]

조와 5년(1016년) 산조 천황양위에 따른 고칸(御羹, 축하연)·경고(慶賀, 축하 의례) 의식이 거행될 때, 아키미쓰는 스스로 의식의 주최를 자청했다. 미치나가는 노령인데다 무능하다고 알려진 아키미쓰가 의식을 치르는 것에 불안을 느껴 만류했지만, 아키미쓰는 이를 강행했다. 그는 식순을 적은 초지(종이 쪽지)를 가지고 의식에 임했으나, 결과적으로 의식 진행에서 실수와 실태가 많아 또다시 공경들의 조롱을 샀다. 사네스케는 『쇼유키』에 "(실태를) 일일이 쓰고 있으면 붓이 닳을 것"이라고 기록했으며[5], 미치나가 또한 "지극히 어리석고 또 지극히 어리석다"라고 혹평했다고 전해진다.[6] 당시 헤이안 시대에는 전례 의식이 매우 중시되었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아키미쓰는 무능한 인물로 여겨져 공가 사회에서 경시되었다.[7]

다만,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7] 아키미쓰는 미치나가가 전권을 장악한 시기에도 20년 이상 대신의 자리를 지켰다는 점, 그리고 사네스케의 비판은 자신의 학문적 유파(오노미야류)의 견해에 반하는 행동에 대한 비판이 많아 주관적일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실제로 사네스케는 현명한 신하로 알려진 아키미쓰의 사촌 후지와라노 사이노부에 대해서도 비슷한 신랄한 비판을 남겼다. 또한, 의식에서의 실수가 미치나가에 대한 견제를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아키미쓰 자신은 전례 의식을 경시하지 않았으며, 능력과는 별개로 진정(정무 회의)과 같은 정무에도 성실히 참여했다. 조토쿠 4년(998년) 이세국에서 다이라노 고레히라와 다이라노 무쓰요리 사이에 벌어진 합전 사건 처리 과정에서, 아키미쓰는 진정에 참여한 공경 수가 적다는 점을 지적하며 진정의 규정과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8] 이는 그가 공경 사회에서 경시당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정무에 대한 이해는 갖추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2. 4. 딸 겐시의 입궁과 좌절

조토쿠 2년(996년) 아키미쓰는 딸 겐시를 이치조 천황에게 뇨고로 입궁시켰다. 당시 주고였던 데이시는 조토쿠의 변으로 실각한 고레치카의 여동생이었고, 정적 미치나가의 딸은 아직 어려 입궁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겐시가 첫 황자를 낳는다면 아키미쓰가 천황의 외척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기대대로 다음 해인 조토쿠 3년(997년) 겐시는 임신했다. 겐시는 출산을 위해 호리카와 저택으로 물러나 머물렀고, 아키미쓰는 승려들을 모아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가지기도를 열었다. 그러나 겐시는 해산 달이 되어도 전혀 출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키미쓰는 겐시를 절에 데려가 안산 기도를 올리게 했고, 그제야 산기가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물만 흘러나올 뿐 아기는 나오지 않았다. 이 소동으로 아키미쓰 부녀는 세상의 큰 조롱거리가 되었다[4].

조호 원년(999년)에는 미치나가가 자신의 장녀 쇼시를 뇨고로 입궁시켰고, 이듬해인 조호 2년(1000년)에는 쇼시를 중궁으로 삼고 기존의 중궁 데이시를 황후로 올렸다. 한 명의 천황 아래 두 명의 왕후(정실)를 두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지만, 미치나가는 강력한 권세로 이를 밀어붙였다. 쇼시는 아직 어렸기에 겐시가 먼저 황자를 낳을 가능성이 남아있었으나, 겐시는 다시 임신하지 못했다. 결국 간코 5년(1008년) 쇼시가 아쓰히라 친왕(훗날 고이치조 천황)과 아쓰나가 친왕(훗날 고스자쿠 천황)을 연이어 낳으면서, 미치나가와의 권력 격차가 벌어졌고 아키미쓰가 외척이 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2. 5. 산조 천황과의 관계

간코 8년(1011년) 이치조 천황붕어하고 산조 천황(레이제이 천황의 황자)이 즉위했다. 황태자(도구)에는 쇼시가 낳은 아쓰나리 친왕(고이치조 천황)이 세워졌다. 미치나가는 산조 천황의 외숙부에 해당했지만, 두 사람은 대립하여 정무가 정체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때 산조 천황은 학식 있는 다이나곤 사네스케에게 의지하려 했으나, 우대신이었던 아키미쓰는 좌대신 미치나가에게 아첨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 무렵, 아키미쓰의 딸이자 미망인이었던 겐시가 산기 미나모토노 요리사다와 연애 관계를 맺었다. 이에 격분한 아키미쓰는 겐시와 의절하고 강제로 머리카락을 잘라 비구니로 만들려 했으나, 겐시는 요리사다와 함께 도망쳐 후에 딸 두 명을 낳았다. 또한 아키미쓰는 자신의 저택인 호리카와 저택을 여동생 엔시에게만 상속하고 겐시에게는 상속하지 않는 결정을 내렸고, 겐시는 이 문제에 대해 쇼시에게 상담하기도 했다.

조와 5년(1016년), 산조 천황은 눈병을 이유로 미치나가의 강한 압박을 받아 퇴위하게 되었다. 궁중에서 고립된 산조 천황은 아쓰나리 친왕에게 양위하는 것을 인정하는 대신, 자신의 첫째 황자인 아쓰아키라 친왕을 황태자로 삼을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미치나가도 이를 받아들였다. 아쓰아키라 친왕에게는 아키미쓰의 딸 엔시가 시집가 아들(아쓰사다 친왕)까지 낳은 상태였기에, 아키미쓰에게는 다시 외척이 될 가능성이 열렸다. 그러나 이때 아키미쓰는 이미 70세를 넘었고, 아들 시게이에는 출가한 상태였다.

산조 천황의 양위에 따른 고칸(御羹)·경고(警固) 의식이 거행될 때, 아키미쓰는 스스로 의식의 주최를 자청했다. 미치나가는 고령이고 무능하다고 알려진 아키미쓰가 의식을 치르는 것에 불안을 느껴 완곡하게 거절했지만, 아키미쓰는 이를 강행했다. 아키미쓰는 식순을 적은 종이를 들고 의식에 임했으나, 진행 과정에서 실수가 잦아 또다시 공경들의 조롱을 샀다. 사네스케는 자신의 일기 『쇼유키』에 "(실수를) 일일이 쓰다가는 붓이 닳을 지경"이라고 기록했으며[5], 미치나가 역시 "지극히 어리석고 또 지극히 어리석다"라고 비난했다고 전해진다[6]. 당시에는 전례 의식이 매우 중시되었기에,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아키미쓰는 무능한 인물로 여겨져 공가 사회에서 경시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는, 미치나가가 전권을 장악한 시기에도 아키미쓰가 20년 이상 대신의 지위를 유지했다는 점, 사네스케의 비판이 특정 유파의 관점에 치우쳤을 수 있다는 점, 의식에서의 실수가 미치나가에 대한 견제를 위한 의도적 행동이었을 가능성 등을 들어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7].

같은 해(1016년) 아쓰나리 친왕이 즉위하여 고이치조 천황이 되자, 약속대로 아쓰아키라 친왕이 황태자가 되었다. 하지만 아쓰아키라 친왕은 미치나가와 외척 관계가 없었고 장인인 아키미쓰 또한 의지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기에 그의 입지는 매우 불안정했다. 다음 해인 간닌 원년(1017년) 3월, 미치나가가 사임하여 공석이 된 좌대신 자리에 아키미쓰가 올랐다. 같은 해 5월, 실의에 빠져 있던 산조 상황붕어하자, 불과 3개월 후인 8월에 아쓰아키라 친왕은 스스로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미치나가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아쓰아키라 친왕에게 상황에 준하는 대우와 함께 쇼이치조인(小一条院) 칭호를 주고, 자신의 딸 간시와 결혼시켰다. 이로 인해 아쓰아키라 친왕은 아내 엔시와 어린 아들 아쓰사다 친왕을 버리고 간시에게 갔다. 남편에게 버려진 엔시는 절망 속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이 사건으로 아키미쓰는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었고[9], 미치나가를 깊이 원망하여 도마법사에게 주술을 의뢰했다고도 전해진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아키미쓰는 좌대신으로서 수년간 출사를 계속했다. 간닌 원년(1017년) 10월, 화재로 집을 잃은 가사를 위해 자신의 호리카와 저택 일부를 내어 거처를 마련해 준 일에 대해, 사네스케는 "세상이 이를 기꺼워하지 않고 기이하게 여길 뿐"이라고 평했지만[10], 이는 아키미쓰의 인정 많은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간닌 2년(1018년), 미치나가는 고이치조 천황에게 딸 이시를 입궁시켰다. 이시를 중궁으로 삼으려 할 때, 황후 자리에는 세이시가, 중궁 자리에는 겐시가 있었고 황태후 자리만 비어 있었다. 이에 겐시를 황태후로 올리고 빈 중궁 자리에 이시를 앉히기로 결정했다. 의식에서 "중궁(겐시)을 황태후로 삼는다"는 선명(宣命)을 작성해야 했는데, 아키미쓰는 실수로 "황후(세이시)를 황태후로 삼는다"고 지시하여 또다시 미치나가의 질책을 받았다[11].

치안 원년(1021년) 정월, 아키미쓰는 종1위에 서임되었다. 같은 해 5월 25일 미시(未時)[12]에 향년 78세로 사망했다. 최종 관위는 좌대신 종1위였다.

아키미쓰 사후, 만주 2년(1025년) 엔시에게서 아쓰아키라 친왕을 빼앗았던 간시가 병사하고, 같은 해 황태자 아쓰나가 친왕(고스자쿠 천황)의 비였던 기시가 출산 직후 급사했다. 2년 후에는 산조 천황의 중궁이었던 황태후 겐시마저 사망했다. 미치나가의 딸들이 연이어 죽음을 맞이하자, 사람들은 이를 아키미쓰와 엔시의 원령에 의한 저주라고 두려워했다[13]. 이로 인해 아키미쓰는 '''악령 좌부'''(悪霊左府)라고 불리게 되었다.

2. 6. 좌대신 승진과 죽음

조와 5년(1016년) 고이치조 천황 (아쓰나리 친왕)이 즉위하고, 아쓰아키라 친왕이 황태자(도구)가 되었다. 아쓰아키라 친왕은 아키미쓰의 딸 엔시와 결혼하여 아들(아쓰사다 친왕)도 낳았기에, 아키미쓰에게는 다시 외척이 될 가능성이 생겼다. 그러나 이때 아키미쓰는 이미 70세가 넘은 고령이었고, 아들 시게이에도 이미 출가한 상태였다. 같은 해 산조 천황의 양위 의식에서 아키미쓰는 의식 진행에 실수를 연발하여 후지와라노 사네스케로부터 『쇼유키』에 "(실태를) 일일이 쓰고 있으면 붓이 닳을 것"이라는 혹평을 듣고[5], 미치나가에게서도 "지극히 어리석고 또 지극히 어리석다"라는 비난을 받았다[6].

간닌 원년(1017년) 3월, 미치나가가 사임하면서 공석이 된 좌대신 자리에 아키미쓰가 올랐다. 같은 해 5월 산조 상황이 붕어하고, 불과 3개월 후인 8월에는 황태자 아쓰아키라 친왕이 미치나가의 영향 등으로 스스로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미치나가는 아쓰아키라 친왕에게 상황(上皇)에 준하는 대우와 쇼이치조인 칭호를 주고, 자신의 딸 간시와 결혼시켰다. 이로 인해 아쓰아키라 친왕은 아내 엔시와 어린 아들 아쓰사다 친왕을 버리고 간시에게로 떠나갔다.

남편에게 버려진 엔시는 깊은 절망에 빠져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이 사건으로 아키미쓰는 큰 충격을 받아 하룻밤 사이에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었다고 전해지며[9], 미치나가를 깊이 원망하여 도마법사에게 저주를 의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좌대신이 된 후에도 아키미쓰는 몇 년간 출사를 계속했다. 간닌 원년(1017년) 10월, 화재로 집을 잃은 가사(家司)를 위해 자신의 저택인 호리카와 저택(堀河第)의 일부를 내어 거처로 삼게 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사네스케는 『쇼유키』에 "(세상 사람들이) 기꺼이 따르지 않고, 참으로 기이하게 여길 뿐이다"라고 기록했지만[10], 이는 그의 인정 많은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간닌 2년(1018년) 미치나가의 딸 이시고이치조 천황의 중궁이 될 때, 기존 중궁이던 겐시를 황태후로 옮기는 의식에서 아키미쓰는 또다시 절차상 실수를 하여 황후 세이시를 황태후로 한다고 잘못 지시하는 바람에 미치나가로부터 질책을 받았다[11].

치안 원년(1021년) 정월, 종1위에 서임되었다. 같은 해 5월 25일, 향년 78세로 사망했다[12]. 최종 관직은 좌대신 종1위였다.

아키미쓰 사후, 만주 2년(1025년) 엔시에게서 아쓰아키라 친왕을 빼앗았던 간시가 병사하고, 같은 해 동궁(아쓰나가 친왕, 후의 고스자쿠 천황)의 비였던 기시도 출산 직후 급사했다. 2년 뒤에는 산조 천황의 중궁이었던 황태후 겐시마저 사망했다. 미치나가의 딸들이 연이어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자, 사람들은 이를 아키미쓰와 그의 딸 엔시의 원령(怨靈)에 의한 저주라고 두려워했으며[13], 이로 인해 아키미쓰는 '''악령 좌부'''(惡靈左府)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3. 상반된 평가

후지와라노 아키미쓰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당대의 기록, 특히 사네스케의 일기 『쇼유키』에서는 아키미쓰를 유소쿠코지쓰(고실과 의례)에 어둡고 무능하며, 권력자인 미치나가에게 아첨하는 인물로 묘사하며 혹평했다.[3][5][6]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는 그가 중요한 의식에서 실수를 연발하고 공경들의 조롱을 샀다는 기록들로 뒷받침된다. 사후에는 그의 원령이 재앙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돌아 '악령 좌부'(惡靈左府|아쿠료 사후일본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얻었다.[13]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미치나가가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시기에도 아키미쓰가 20년 이상 대신의 지위를 유지했다는 점[7], 그리고 그가 (능력과는 별개로) 진정(정무 회의) 등 정무에 참여하며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기록도 존재한다.[8] 사네스케의 비판이 개인적인 학파(오노미야류)의 관점에 치우쳤을 가능성이나, 의식에서의 실수가 정치적 의도를 가졌을 수 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7] 이처럼 아키미쓰는 무능한 아첨꾼이라는 평가와 오랜 기간 고위직을 유지하며 정무에 참여한 관료라는 상반된 모습이 공존하는 인물이다.

3. 1. 부정적 평가: 무능과 아첨

사네스케는 그의 일기 『쇼유키』에서 아키미쓰에 대해 "출사 이래, 만인에게 조롱받고 있다"라고 혹평했다.[3] 아키미쓰는 이전부터 무능함으로 알려져 있었고, 특히 유소쿠코지쓰(고실과 의례)나 전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산조 천황미치나가가 대립했을 때, 아키미쓰는 학식 있는 다이나곤 사네스케와 달리 좌대신 미치나가에게 아첨하는 모습을 보였다.

1016년 산조 천황의 양위에 따른 고칸·경고 의식에서는 스스로 주최를 자청했으나, 노령과 무능함으로 인해 의식 진행 중 실수를 연발하여 공경들의 조롱을 샀다. 사네스케는 『쇼유키』에 "(아키미쓰의 실태를) 일일이 쓰고 있으면 붓이 닳을 것"이라고 기록했으며[5], 미치나가 역시 "지극히 어리석고 또 지극히 어리석다"라고 비난했다고 전해진다.[6] 당시 헤이안 시대에는 전례 의식이 매우 중시되었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아키미쓰는 무능한 인물로 여겨져 공가 사회에서 경시되었다.

1018년 미치나가의 딸 이시고이치조 천황의 중궁으로 세우는 의식에서도, 기존 중궁이었던 겐시를 황태후로 옮기는 선명을 내릴 때, 아키미쓰는 실수로 "황후(세이시)를 황태후로 한다"라고 명하여 미치나가에게 다시 한번 질책을 받았다.[11]

다만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7] 아키미쓰는 미치나가가 전권을 장악한 시기에도 20년 이상 대신의 지위를 유지했으며, 사네스케의 비판은 자신의 학파(오노미야류) 견해와 다른 행동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의식에서의 실수가 미치나가에 대한 견제를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또한 아키미쓰는 진정(정무 회의)과 같은 정무에도 참여했으며, 이세국에서 발생한 다이라노 고레히라와 다이라노 무쓰요리의 합전 사건 처리 과정에서 진정의 규정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발언한 기록도 있다.[8]

아키미쓰 사후, 미치나가의 딸들인 간시, 기시, 황태후 겐시가 연이어 사망하자, 사람들은 이를 아키미쓰와 그의 딸 엔시의 원령에 의한 저주라고 두려워했으며[13], 이로 인해 아키미쓰는 '''악령 좌부'''(惡靈左府|아쿠료 사후일본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3. 2. 긍정적 평가: 장기간의 대신 재임과 정무 노력

미치나가가 정권을 장악한 시기에도 아키미쓰는 20년 이상 대신의 자리를 유지했다. 그는 후지와라노 기미스케를 넘어 우대신이 되었으며, 이후 미치나가의 친족이나 다른 유력자들이 있었음에도 그 지위를 내주지 않았다.

사네스케는 그의 일기 『쇼유키』에서 아키미쓰의 의식 집행 능력에 대해 비판했지만, 이러한 평가에는 다른 관점에서 반론도 제기된다[7].

  • 당시 유소쿠코지쓰(조정의 의식과 예법)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했으며, 사네스케의 비판은 자신의 오노미야류 견해와 다른 방식이 채택되었을 때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아키미쓰의 사촌이자 현명한 신하로 평가받던 사이노부에 대해서도 유사한 비판을 가한 기록이 있다.
  • 아키미쓰가 의식에서 보인 실수 중 상당수가 미치나가와 관련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일부 실수는 미치나가를 견제하려는 의도적인 행동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아키미쓰는 전례 의식을 경시하지 않았으며, 능력 여부와는 별개로 진정(陣定, 정무 회의)과 같은 정무에도 힘썼다. 예를 들어, 조토쿠 4년(998년) 이세국에서 다이라노 고레히라와 다이라노 무쓰요리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을 때, 이들의 처벌을 논의하는 진정이 열렸다. 처음에는 사형으로 결정되었으나 후에 감형되어, 고레히라는 위계 박탈 없는 이향(伊郷, 본거지 외 추방), 무쓰요리는 오키국으로의 유배로 결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키미쓰는 진정에 참여하여, 만약 이향 처분이 내려진다면 그 장소를 정하기 위해 다시 진정을 열어야 하는데, 참석한 공경 수가 적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8]. 이 일화는 아키미쓰가 다른 공경들에게 다소 경시당하여 그가 상경(上卿, 회의 주재자)일 때 참석자가 적었을 수 있다는 점과 함께, 그가 진정의 절차와 중요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4. 가계


  • 아버지: 후지와라노 가네미치
  • 어머니: 쇼시 여왕 - 모토히라 친왕의 딸[1]
  • 부인: 세이시 내친왕 - 무라카미 천황의 다섯째 황녀
  • * 장남: 후지와라노 시게이에 (977-?)
  • * 장녀: 후지와라노 겐시 (979?-?) - 이치조 천황뇨고, 이후 미나모토노 요리사다의 부인
  • * 차녀: 후지와라노 엔시 (985-1019) - 쇼이치조인의 미스도코로
  • 부인: 후지와라노 엔료의 딸 - 원래 후지와라노 미치카네의 부인
  • 생모 불명의 자녀
  • * 아들: 주케
  • * 아들: 후지와라노 아키타다


도쿠가와 씨의 후다이 가신으로, 에도 시대후다이 다이묘하타모토가 된 혼다 씨와 사가 번의 중신 이시이 씨는 아키미쓰의 후손을 자처했다.

5. 악령 좌부(悪霊左府) 전설

아키미쓰가 사망한 후, 만주 2년(1025년)에 그의 딸 엔시로부터 아쓰아키라 친왕을 빼앗았던 미치나가의 딸 간시가 병으로 사망했다. 같은 해 동궁(아쓰나가 친왕)의 비였던 기시 역시 출산 직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2년 뒤에는 산조 천황의 중궁이었던 황태후 겐시마저 사망했다. 이처럼 미치나가의 딸들이 연이어 죽음을 맞이하자, 사람들은 이를 아키미쓰와 그의 딸 엔시 원령의 저주 때문이라고 여기며 두려워했다[13]。 이로 인해 아키미쓰는 '''악령 좌부'''(悪霊左府)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6. 관련 작품


  • NHK 대하드라마 《빛나는 너에게》(光る君へ일본어, 2024년) - 배우: 미야가와 이치로타 (宮川 一朗太)

7. 추가 설명

아키미쓰는 동시대 인물들에게 무능하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특히 유소쿠코지쓰와 전례에 밝았던 후지와라노 사네스케는 자신의 일기 『쇼유키』에서 아키미쓰를 "출사 이래 만인의 조롱거리였다"라고 혹평했다[3]. 고칸·경고 의식 진행 시 실수가 잦아 공경들의 조롱을 샀고, 사네스케는 "(실수를) 일일이 쓰자면 붓이 닳을 것"이라고 기록했으며[5],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역시 "지극히 어리석고 또 어리석다"고 비난했다고 한다[6]. 당시에는 전례 의식이 매우 중시되었기에,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아키미쓰는 무능한 인물로 여겨져 공가 사회에서 경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에는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7]


  •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정권을 장악한 시기에도 아키미쓰는 20년 이상 대신의 자리를 지켰다(후지와라노 기미스케를 넘어 우대신이 되었고, 이후 미치나가의 측근이나 다른 유력자들이 있었음에도 그 지위를 유지했다).
  • 당대에도 유소쿠코지쓰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했으며, 사네스케의 비판은 자신의 학파(오노미야류) 견해와 다른 행동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실제로 아키미쓰의 사촌이자 현명한 신하로 알려진 사이노부에 대해서도 사네스케는 비슷한 비판을 남겼다.
  • 의식에서의 실수 중 상당수가 미치나가와 관련된 점을 고려할 때, 일부 실수는 미치나가에 대한 견제를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아키미쓰 스스로는 전례 의식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으며, 능력과는 별개로 진정(陣定, 헤이안 시대의 국정 회의)과 같은 정무에도 힘썼다. 조토쿠 4년(998년) 이세국에서 다이라노 고레히라와 다이라노 무쓰요리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을 때, 죄를 논하는 진정에서 아키미쓰는 참여한 공경 수가 적음을 지적하며 진정의 규정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8] 간닌 2년(1018년) 10월에는 화재로 집을 잃은 가사(집사)를 위해 자신의 저택인 호리카와 제(堀河第)의 복도를 내어주어 살게 했는데, 이에 대해 "세상이 기꺼이 따르지 않아, 참으로 기이하게 여길 뿐이다"라는 평가[10]가 남아 있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딸 겐시를 이치조 천황뇨고로 들여보내 외척이 될 기회를 노렸으나, 겐시의 임신은 상상임신으로 끝나 조롱거리가 되었다.[4] 이후 겐시는 미나모토노 요리사다와 사랑에 빠졌고, 격분한 아키미쓰는 겐시와 의절하고 머리카락을 잘라 출가시키려 했으나 겐시는 요리사다와 도망쳤다. 다른 딸 엔시는 황태자 아쓰아키라 친왕과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았으나, 미치나가의 압력으로 아쓰아키라 친왕이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나고 미치나가의 딸 간시와 결혼하면서 버려졌다. 남편에게 버려진 엔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이 일로 아키미쓰는 큰 충격을 받아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되었고[9], 미치나가를 저주하기 위해 도마법사(주술)를 고용했다고 전해진다. 간닌 2년(1018년) 미치나가가 딸 이시고이치조 천황에게 입궁시킬 때, 겐시를 황태후로 옮기는 의식에서 아키미쓰는 실수로 황후(세이시)를 황태후로 삼으라는 잘못된 명령을 내려 미치나가에게 비난을 받았다[11].

아키미쓰 사후, 엔시를 버리고 간시와 결혼했던 아쓰아키라 친왕의 아내 간시(만주 2년, 1025년), 동궁(아쓰나가 친왕, 후의 고스자쿠 천황)의 비 기시(같은 해), 산조 천황의 중궁이었던 황태후 겐시(2년 후) 등 미치나가의 딸들이 연이어 사망하자, 사람들은 이를 아키미쓰와 엔시 원령의 저주라며 두려워했다[13]. 이로 인해 아키미쓰는 '악령 좌부'(惡靈左府)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참조

[1] 문서 能子女王(有明親王の娘)の説もある
[2] 서적 尊卑分脈
[3] 문서 『小右記』寛仁元年11月18日条
[4] 서적 栄花物語
[5] 문서 『小右記』長和5年正月25日条
[6] 문서 『小右記』長和5年正月27日条
[7] 논문 摂関期の有職故実 -御堂流の検討から- 日本史研究会 2001
[8] 서적 日本の歴史06 道長と宮廷社会
[9] 서적 十訓抄
[10] 문서 『小右記』寛仁元年10月18日条
[11] 서적 日本の歴史5 王朝の貴族 中央公論新社
[12] 문서 『春記』治安元年5月25日条
[13] 서적 栄花物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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